지금 이보영은 어디든지 갈 수 있다 || 엘르코리아 (ELLE KOREA)


지난해 열심히 촬영했던 12부작 드라마 〈하이드〉가 3월 23일 공개를 앞두고 있습니다. 공개를 기다리는 마음은

10월에 촬영을 마쳤어요. 열심히 했고, 잘 촬영했죠. 이제 크게 떨리거나 긴장되는 일은 별로 없어요. 예전에는 작품이 잘되거나 안 되는 것에 일희일비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 하나하나가 제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걸 알거든요.

 
 

셔츠와 팬츠는 모두 Ports 1961. 슈즈는 Christian Louboutin

셔츠와 팬츠는 모두 Ports 1961. 슈즈는 Christian Louboutin

결과에 연연하지 않게 됐군요

결과와 관계없이 어차피 저는 계속 걸어가야 하는 거니까요. 그런데 그 과정이 흡족하지 않았다, 그러면 좀 화가 나죠. “내 소중한 시간을 쏟아부었는데!” 하면서(웃음).

 

〈너의 목소리가 들려〉(2013) 〈귓속말〉(2017)> 〈마더〉(2018) 〈마인〉(2021) 〈대행사〉(2023) 등  돌아보면 여성 서사라는 단어가 지금보다 생소한 때부터 여성 캐릭터가 돋보이는 작품에서 배우 이보영을 자주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선택의 궤적을 돌아보면 어떤가요

잘 선택했죠! 수동적인 성격이 아니에요. 수용적이지도 않고요. 일상에서도 끌려가야 하는 상황일 때 답답함을 느끼는데 연기할 때도 마찬가지예요. 데뷔 초였던 2000년대 초반에는 얌전하고 청순한 이미지에 맞춰 수동적 역할을 주로 했는데 캐릭터를 마음 깊이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그래도 제 목소리를 조금씩 낼 수 있었던 30대 중반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들을 찾아갈 수 있었죠.

 

남편 차성재(이무생)의 실종 이후 나문영의 삶은 통째로 흔들립니다. 결혼생활 10년을 넘긴 기혼자로서 ‘내가 이런 상황이라면 어땠을까?’라는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겠어요

제가 상상력이 부족한가요? 그런 상상은 안 했는데(웃음). 하지만 나도 남편이 어떤 한 측면만 보여줬다면 그 사람 속을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나도 나를 모르는데 부부라고 어떻게 다 알겠냐는 생각은 했어요. 부부가 아니라 대인관계도 마찬가지죠. 사람들은 보여주고 싶은 자기 모습만 보여주니까. 나는 그 사람을 아는게 아니라 내게 보여주려 했던 그 사람 모습을 아는 거잖아요. 그래도 포장된 가식적인 모습이라도 분명 몇 퍼센트의 진심은 있다고 봐요.

 
 

 셔츠와 스커트, 슈즈는 모두 Ferragamo.

셔츠와 스커트, 슈즈는 모두 Ferragamo.

문영을 연기하며 즐거웠던 것은요? 주어진 스펙트럼에 맞춰 잘 변주한 게 있다면

외로웠어요. 〈대행사〉는 정말 촬영장이 재미있었거든요. 교실에서 수업하듯 직장이라는 한 공간에서 여러 명과 합을 맞추는 색다른 경험을 했죠. 그런데 문영은 집에서 혼자 추리를 하고, 혼자 아이를 돌보며 계속 혼잣말을 해요. 내가 맞게 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들더라고요. 혼자 내내 쫓기며 돌아다니다가 이혜영 선생님 만나면 너무 반가웠던 〈마더〉 때도 생각났죠.

 

나문영이라는 캐릭터가 마음에 끌려 택한 작품은 아니었군요(웃음)

종전의 답변과 어긋나지만 문영은 주체적인 캐릭터가 아니에요. 계속 터지는 사건에 치이며, 거기에 끝없이 놀라고 반응하거든요. 검사 출신 변호사라는 설정도 크게 활용되지 않고요. 그래서 처음에는 못하겠다고 했는데 이 다음에 무슨 일이 생길까, 어디까지 갈까 궁금한 거예요. 대본이 정말 재미있었거든요. 그럼 나도 한번 휩쓸려 보자, 이야기를 따라가는 경험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임했어요.

 

이보영의 삶에는 파도가 어느 정도 일었던 것 같나요. 연기 비전공자로 갑작스럽게 연예계 생활을 시작하며 힘들었던 20대에 대해 털어놓은 적도 있습니다

미래를 깊게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았어요. 자존심 상하거나 결핍을 느낄 때도 별로 없었죠. 그러다가 일이 완전히 끊긴 적이 있는데, 처음에 1년은 그게 좋았어요. 만날 잠도 못 자면서 날이 선 채로 촬영하고, 모든 일에서 내 의사표현은 전혀 존중되지 않고…. 이 모든 상황에서 도망가고 싶다고 생각하던 때였으니까.

 
 

셔츠와 드레스는 모두 Dior.

셔츠와 드레스는 모두 Dior.

20대였죠? 어린 여성의 의사는 존중받기 힘들죠. 2000년대 초반은 더욱 그랬을 것 같아요

하루는 말에서 떨어졌는데도 그날 저녁 허리에 부목을 대고 촬영해야 했어요. 그 후유증이 지금도 있는데, 그때는 그게 당연했어요. 아프다고 하면 근성 없다는 소리를 들었죠. 혹시 드라마에 민폐를 끼칠까 봐 구르고 뛰는 촬영을 다 마친 다음에 임신 사실을 털어놓는 출연자 이야기가 미담처럼 떠돌았으니까요. 마음속에 화는 쌓이는데 제가 불만을 말하면 “응응. 예뻐, 예쁘게 나오니까 괜찮아” 이런 식인 거예요. 그러니 촬영을  안해도 되는 게 좋았을 수밖에요.

 

하지만 마음이 달라졌군요

어느 날 알던 방송 관계자에게 전화가 왔어요. “감독들이 다 너 싫대. 지금 네 또래 누구는 이런 작품 한다는데 넌 샘도 안 나니? 내가 너 때문에 속상해 죽겠다”라고 하더군요. 처음에는 굳이 왜 이런 말을 내게 하지 싶은 정도였는데 문득  자존심이 ‘확’ 상하는 거예요. 자존심도 잃고, 결핍도 느끼며 소중함과 절실함을 깨닫게 된 시간이 파도처럼 왔다 갔던 것 같아요. 친동생이 몇 년간 고생하다 취업하고 기뻐할 때도 제가 그랬거든요. “앞으로 분명히 힘들 거야. 그런데 지금 기분을 절대 잊지 마”라고. 지금의 제가 일이 있음에 감사하고, 활기차게 들뜬 촬영현장의 공기에 행복을 느끼는 것처럼요.

 

실패나 고통에서 얻는 게 있다지만 부모의 마음은 또 다를 것 같은데요

맞아요! 적절한 결핍이 아이에게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내심 겪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있죠. 하지만 결국에는 겪지 않을까요? 그리고 알잖아요. 시간은 항상 흘러가기 마련이고, 지나면 또 괜찮다는 것을.

 
 

이너 웨어 톱은 Axel Arigato. 재킷과 스커트, 브리프는 모두 Miu Miu.

이너 웨어 톱은 Axel Arigato. 재킷과 스커트, 브리프는 모두 Miu Miu.

후배들에게는 어떤 선배인가요

저는 일부러 거리를 두는 편 같아요. 충고하기도, 굳이 말을 하는 게 조심스러울 때도 있거든요. 요즘 ‘공감’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일터에서는 누군가에게 공감하고 지지할 여유가 없지 않나요? 다들 자기 일을 하고 필요한 걸 묻고 찾기 바쁘죠. 안 보고 안 들으려는 게 제 나름의 존중 방식이에요.

 

하지만 〈대행사〉에서 함께했던 손나은 씨 촬영장에 커피 차를 보냈던데요

아유, 그 정도는 하죠(웃음)! 도와달라고, 이야기 들어달라고 말하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저도 응하죠. 그런데 이제는 그런 말조차 사람들이 잘 하지 않잖아요. 저는 역지사지를 많이 하는 편인데, 제 어릴 때를 돌아봤을 때 나이 많은 선배와 함께하는 자리가 마냥 편하지만은 않기도 했고요. 아무튼 ‘꼰대’ 소리 안 듣기 위해 무지 애쓰고 있어요!

 

완전 꼰대죠. 티를 안 낼 뿐 속으로는 ‘근성이 없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으니까(웃음). 그러다 성실한 친구들이 눈에 띄면 또 유난히 예뻐 보이기도 하고.

 
 

이너 웨어 톱은 Axel Arigato. 코트는 Salvatore Santoro.

이너 웨어 톱은 Axel Arigato. 코트는 Salvatore Santoro.

30대 초반에 펴냈던 에세이집 〈사랑의 시간들〉에서 나이 듦에 관해 쓴 글이 기억나요. “나이 들어서 주책이다라는 말만큼 냉정한 말도 없는 것 같다. 내 나이를 두고 늙었다고 지적하는 말에 공감할 수 없다. 나는 아직 살아갈 날이 훨씬 많은데”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해요. 요즘 아이돌들이 팬에게 밝게 손 흔들며 인사하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고 부러운 게 저는 20대 때 모두가 나를 욕하는 것 같아 숨어 다니던 시기가 있었거든요. 데뷔 3~4년 만에 처음으로 제 기사에 달린 댓글을 봤는데, 별별 말이 다 있더군요. 서른이 넘은 뒤에야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고 내가 누릴 것을 영위하며 살게 됐어요.

 

오늘 화보는 어디든 갈 수 있는 ‘쿨’한 이보영이라는 컨셉트인데요. 돌아봤을 때 멀리 가보려고 용기를 낸 건 언제였나요

전 용기는 항상 내요. 겁이 없어요. 그래도 하나만 꼽자면 영화 〈나는 행복합니다〉(2008) 촬영 같아요. 어느 날 나를 보는데, 제 연기를 못 봐주겠더라고요. 그러던 때에 출연 제의가 들어왔고, 현장이 엄격하기로 알려진 윤종찬 감독님 작품인 데다가 상업영화도 아닌 저예산영화라 다들 말렸어요. 아니나 다를까, 현장에서 만날 깨지고 혼나고…. 정말 괴로웠지만 그만큼 큰 배움의 현장이었어요. 모두가 말리는데도 찍겠다고 촬영장에 내려갔던 그때의 저를 칭찬하고 싶어요. 이후 제 연기가 많이 달라졌거든요.

 

이보영을 연기력으로 뭐라고 하는 사람은 이제 없죠

그전에 엄마는 제 작품을 칭찬한 적이 없어요. 제가 TV에 나오면 ‘걸음걸이가 왜 그랬니?’라거나 정말 TV에 나온 딸을 대하듯 보셨거든요. 그런데 그 영화가 호흡도 길고 무거운 내용이거든요? 시사회에 온 사람들이 코 고는 소리가 들릴 정도였는데, 엄마가 영화를 보고 와서 빨래를 정리하다가 문득 “에휴…. 걔는 그래서 어떻게 살고 있다니?”라는 거예요. 처음으로 엄마 마음을 먹먹하게 한 ‘극중 인물’로 작품 속 저를 본 거죠.

 
 

셔츠와 코트, 팬츠는 모두 Dries Van Noten. 부츠는 Gianvito Rossi.

셔츠와 코트, 팬츠는 모두 Dries Van Noten. 부츠는 Gianvito Rossi.

40대인 이보영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더 기대하는 것은

이제는 기대보다 걱정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아이들이 자라면 어떨지 그런 기대와 상상을 옆에서 저 대신 많이 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 진정시키기 바쁘고요(웃음). 하루하루 아프지 않고 행복하면 되죠.

 

그럼 이 순간만큼은 정말 완벽하게 행복하다고 느꼈던 적은

저는 육아가 좋아요. 되게 힘든데, 그래도 이걸 해내는 자신이 되게 뿌듯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되나. 아직도 아이들이 제 양팔에 한 명씩 매달려 자는데 엄청 흐뭇해요. 한번은 그 마음이 벅차올라 “엄마 진짜 부자 된 것 같아.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부자야!”라고 했는데 아들이 “엄마, 부자가 되려면 돈을 벌어야지”라는 거예요. 그 말도 너무 재미있었는데 딸이 동생에게 그러더라고요. “바보야, 엄마는 우리가 있어서 행복하다는 표현을 그렇게 한 거야”라고. 그때 정말 행복했어요.



Supply hyperlink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Shopping Cart
  • Your cart is empty.